📷 농구스타서 인생의 나락으로..내 인생 후반전엔 '나눔 덩크슛' 📷 “모두 다 잃어봐야 무엇이 소중한지 알겠더라고요. 제 인생에 실패는 없다고 생각했는데.운동하면서 힘들다는 생각과 사회생활에서 힘들다는 생각은 달라요. 지금은 뭐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큰 키로 뭐든 못 넘겠습니까?” 과거 우리나라의 농구선수들을 살펴보면 서양 선수들에 비해 키가 턱 없이 작았다. 때문에 한국농구는 국제대회에서 키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큰 점수 차이로 힘없이 무너지는 상황을 반복했다. 세계의 선수들과 기량의 차이도 있었지만 자신보다 20~30cm이상 큰 키의 선수들을 마크하기에는 애초부터 포기에 가까웠던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농구는 당시 상황과 180도 달라졌다.서양선수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덩크슛은 기본이고 선수들의 힘과 기술도 엄청나게 향상됐다. 비약적인 대한민국 농구발전에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선수들이 많다. 그 중 한국농구 최초로 고공농구 시대를 열었던 한기범을 만나봤다. #영광의 시대 중앙대의 대학부 최다 연승기록 수립, 대학부 대회 전관왕, 농구대잔치 최초로 대학팀 우승. 한기범의 대학시절 경력이다. 그의 대학시절을 자신의 농구역사 중 가장 영광의 시대로 꼽았다. 당시 중앙대 유니폼은 공룡을 연상케하는 초록색이었다. 키가 2m가 넘는 한기범은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대회마다 시원한 덩크슛을 림에 꽂으며 공룡센터로 불렸다. “연세대와 고려대를 70년 아성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그 벽을 넘는 대학들이 없었던 거죠. 당시 대학대회들은 연대와 고대의 우승잔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우승을 했어요. 사람들은 허 재가 우리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우승을 했다고 기억을 하지만 아니에요. 저와 당시 1학년이던 김유택이 연대와 고대의 아성을 무너뜨린거죠” 중앙대의 최초 우승을 이끌었던 한기범이다. 그의 말대로 당시 80년대 중반까지 대학농구는 연대와 고대가 주름잡았다. 어느 대학도 두 대학의 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한기범은 지금의 중앙대 농구부 감독인 김유택과 함께 4강에서 만난 연세대를 꺾고 결승에 진출해 고려대까지 넘어서며 우승을 차지했다. 한기범이 있는 중앙대는 거침이 없었다. 1986년에는 대통령배 85농구대잔치 2차대회에서 실업 정상 현대를 61대 85로 제압하며 대학팀으로는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정상에 올랐다. 당시 양대산맥으로 불리어지던 현대와 삼성의 독주에 중앙대가 못를 박은 것이다. 중앙대가 남자농구 제왕에 오르는 순간이다. 한기범은 김유택과 고공농구의 진수를 보여주며 실업팀을 잠재웠다. 물론 재간동이 허재도 우승 주역 중 하나다. “대회마다 우승을 하며 정상에 있을때 주변에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어요. 김유택도 그랬고 허재도 최고의 선수 였죠.” 📷 한기범의 영광의 시대는 중앙대를 졸업하고 실업팀 기아자동차에 입단하면서도 이어졌다.그가 소속해 있던 기아는 프로농구가 창단되기 직전까지 농구대잔치에서 7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 1983년부터 1993년까지 국가대표,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은메달, 1990년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MVP), 대한민국 최초 덩크왕 등 한기범의 농구인생은 항상 최고의 순간이 함께 했다. “정식으로 농구를 시작한건 중학교때였어요. 키가 크다보니 모든 운동에서 유리했죠. 뭘할까 고민하다 농구를 하게됐어요. 우리집은 과수원을 했었는데 그 덕에 운동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아버지는 배구를 잠깐 하셨죠. 운동을 아셔서 그런지 늘 든든한 후원자셨죠” 농구에 있어서 만큼은 늘 정상에 있었던 한기범이지만 그에게도 이 모든것을 내려놔야 하는 은퇴가 찾아왔다. 초대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직전이여서 더욱 아쉬웠다. #또 다른 도전 사업, 그리고 실패. 1997년 대한민국 농구는 프로농구를 출범하며 새롭게 출발했다. 외국인 선수 도입제도로 화려함을 더 했고 토종 선수들은 외국인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관중들은 열광했고 1990년대 한국농구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하지만 한기범은 이같은 화려함을 맛보지 못하고 1996년 은퇴했다. 발목과 무릎 부상이 그의 은퇴를 결심케 했다. 정말 아쉬웠다. “더 뛰고 싶었어요. 프로가면 계약만해도 돈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 보다 기아에는 한국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후배들이 많았죠. 그들과 함께 코트에서 계속 뛰고 싶었어요” 한기범은 그동안 자신과 함께 해 준 동료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농구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전부였다. 농구인생을 접은 그는 사업가로 새롭게 변신에 도전했다.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뭐든 잘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2000년도 초반 대한민국에는 키 크는 붐이 일어났다.미남미녀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로 훤칠한 키가 가장 우선시 될 정도다. 한기범은 키 크는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녀의 키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한기범의 사업 아이템과 맞아 떨어졌다. 2m5cm의 장신인 자신이 직접 나서 CF모델로 활동하면서 홈쇼핑 등에서 연일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불과 10여개월만에 60억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며 사업가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 했으나 높은 매출에도 불구하고 한기범의 사업은 점점 쇠퇴했다. 운동만 하던 그로서는 기업경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계약서상 투자 등 관련 조항들이 한기범에게는 불리한 조항들뿐이었다. 이 때문에 매출은 높았지만 이득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쉽게 풀리던 일들이 점점 꼬여갔다.이를 막기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유명세 때문인지 주변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제안했다. “돈이 들어오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제가 사람말을 잘 믿는 성격인데 친한 사람들의 말만 듣고 시작한 사업이 한두 개가 아니었죠. 그때마다 참패했어요.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집까지 넘어가며 밑바닥 인생을 맛보게 됐죠. 정말 행복했는데 집사람과 사업문제로 말다툼도 심했고 가정에 위기도 찾아왔죠. 농구하면서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어요. 죽어버릴까 생각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봤기 때문에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아요” 한기범은 다시 일어나고 싶었다. 농구로 비교하면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다. 아직 그에게는 후반전이 남아 있었다. 다시 시작했다. 일반기업에 취업도 해보고 자신의 이름을 건 농구교실, 방송출연 등 재기를 위해 죽어라 뛰었다. #거인, 거인병을 이기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소중한 가정을 지키고 싶었죠. 농구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했어요. 그리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회사에 들어가 영업도 해보고 저녁에는 농구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방송도 출연하며 조금씩 돈을 벌었죠. 많은 돈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조금씩 회복해 갔어요” 하지만 한기범에게는 사업실패 말고도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에 병원에서 마르판 증후군 판정을 받았다. 마르판 증후군은 심장 쪽 대동맥이 부풀어 터져서 사망하는 병으로 키가 큰 이들에게 많이 나타나 일명 거인병으로 불린다. “이 병은 유전성이에요. 50%가 가족력에 있죠. 창피한 얘기지만 혼자 화장실에서 많이 울었어요. 아버지도 병원에서 이 병을 판정받고 1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어요. 동생도 같은 병으로 잃었죠. 저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적이었어요” 당장 수술비도 문제였다. 다행히 한국심장재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수술이 가능했고 두번의 수술 끝에 삶의 희망을 다시 찾았다. 아직 한차례 더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일주일에 한 시간씩 농구를 할 정도로 생활에 전혀 불편이 없다. “정말 힘들다고 생각이들 때 그건 힘든게 아니에요 경험을 해보니까 그 보다 더 최악인 상황이 생길 수 있어요. 하지만 모든게 마음가짐에 있어요. 희망이라는 말은 바로 그 때 쓰는거죠.” #절망에서 찾은 희망, 사회에 뿌리다. “사회가 저를 살려준 거죠.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새로운 삶을 산다고 생각하니까 제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기범 희망재단을 만들었죠” 한기범은 자신의 이름을 건 희망재단을 설립하고 심장병 어린이 돕기 등 우리 주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도움의 손길을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는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많은 이들이 동참을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자신도 그런 나눔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은 것처럼 그 역시 사회에 희망을 뿌리고 싶은 마음이다. “농구할 때 라이벌이 있어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바로 김유택 선수였죠. 김유택이라는 선수가 있어서 제가 그만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좋은일을 하는 선수들이 많아요. 그들의 이름을 딴 재단들이 많죠. 저는 그들과 또 다시 경쟁하는거예요. 나눔의 경쟁이 퍼질수록 사회가 더욱 훈훈해 질테니까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생사의 기로에 서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세월은 지났지만 그의 인생에는 많은 의미가 담긴다. 그는 이제 사회에 희망을 뿌리는 전도사다. 희망나눔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그의 성공을 기대해 본다. 송주현기자/atia@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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